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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 그것은 이야기 | 2009/05/21 06:20

동방정교회

동방정교회 [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y] 블로그담기 | 인쇄

개요

사도교회를 계승했으며, 독특한 전례, 지역 교회들의 독자성 등을 특색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주요3분파들 가운데 하나.

성격과 의의

동방정교회는 처음 7차례 열린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정의된 신조와 관행을 따르는 그리스도교도들의 큰 단체이다. 동방정교회의 전례 문서 혹은 교회법 문서에서 사용되는 공식적인 명칭은 '정통 가톨릭 교회'(Orthodox Catholic Church)이다.

문화적 배경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1054)은 AD 1세기에 시작되어 중세기 내내 계속 되었던 점진적인 소원화(疎遠化) 과정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사건이었다 (→ 로마 가톨릭교). 이 소원화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정치적 사건들에서 비롯되었다. 4~11세기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던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 이후 동로마의 정치적 라이벌인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 로마사). 따라서 이 두 지역에서 교회의 권위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이 동시에 발전했고, 여기서 신학적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로마 교회가 사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개념에 입각한 로마 우위론은, 로마·안티오크·콘스탄티노플 등 지역 교회의 중요성이 그 교회들의 수적·정치적 의의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있다는 동방 교회의 관념과 양립될 수 없었다. 동방 교회의 경우 교리에 관한 분쟁을 조정하는 최고의 권위 기관은 에큐메니컬 공의회였다.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분열되었을 때, 동방정교회 교인들은 중동 지역, 발칸 반도, 러시아에 퍼져 있었으며, 그 중심은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동방정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살고 있다.

교회의 규범

동방 교회는 '독립' 교회들(Autocephalous churches), 즉 각각의 수장 주교의 치리(治理)를 받는 교회들의 협의체로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의 우위성은 칭호와 명예에 그친다 (→ 동방자치교회). 현재 동방정교회에 속한 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이집트), 안티오크 교회(이 교회의 본부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있음), 예루살렘 교회, 러시아 교회, 그루지야 교회, 세르비아 교회, 루마니아 교회, 키프로스 교회, 그리스 교회, 알바니아 교회, 폴란드 교회, 체코슬로바키아 교회, 미국 교회 등이다.

또한 크레타, 핀란드, 일본에는 '자율적인' 교회들이 있다. 이 교회들은 모교회 관구에 교회법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독립 교회들을 언급하는 순서가 이 교회들의 실제적인 영향력이나 수적인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대 교회법이 인정한 대로 콘스탄티노플이 모든 교회의 으뜸이며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위한 상징과 수단이어야 한다는 합의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고대 교회법이 그렇게 인정한 까닭은 콘스탄티노플이 고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정교회 내부에서는 많은 혼란과 행정상의 갈등이 있었다. 특히 서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관할권이 중복 설정되었으며, 정치적인 의욕이 지나쳐 명시된 교회법적 규약이 없는 교회 조직들이 형성되기도 했다.

교회조직

교회법

오늘날 정교회 조직의 항구적인 기준은 〈신약성서〉 이외에 처음 7차례 열린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법령들(법규과 교령), 모든 교회가 그 권위를 인정한 몇몇 지방 공의회의 법령, 이른바 '사도 규준', '교부들의 규준'(교회법상 중요한, 탁월한 교회 지도자들의 발췌선집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사도교회법).

주교직 (→ 주교제도)

정교회에서는 교회를 여러 규준들 및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증언된 원리에 입각해 있다고 본다. 현대의 정교회 신학은 주교직이 성직 중에서 으뜸이며, 따라서 주교 자신이 관할하는 공동체(교구)에서 주교보다 더 높은 권위가 하느님에 의해 제정된 바 없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러나 지역 교회나 주교는 따로 고립된 채 살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각각의 지역 공동체 생활은 현재와 과거에 다른 지역 교회들이 누려왔던 교회 생활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동일성과 연속성은 주교 서품 의식에서 표현된다.

주교는 신앙의 보호자이며, 공동체의 성사를 집행하는 중심이다. 정교회는 사도권 계승 즉, 주교의 사역이 예수의 제자들의 사역과 직접적인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은 기능의 연속성이라기보다는 신앙의 연속성이다.

어떤 주교도 그의 동료들과 일치를 이루지 않고서는 즉, 주교공의회('주교회의')의 일원이 아니고서는 주교로 임명될 수도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도 없다 (→ 시노드). 니케아 공의회(325, 이 공의회에서 결정된 법령들은 오늘날까지도 정교회에서 유효함) 이후, 로마 제국의 각 지역은 새로운 주교를 임명하는 완전히 독립된 단위였으며, 교회법상 최고 법정인 그 지방 고유의 주교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 정교회에서 이 기능은 각 독립 교회의 주교회 의장이 맡았으며, 일반적으로 ' 수도대주교'(metropolitan)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 기능은 ' 총대주교'(patriarch)라고 불리기도 하는 지방 수석대주교(local primate)가 수행한다. 그는 또한 대주교(archbishop:혹은 metropolitan)로 불리기도 하며 이 칭호는 영예로운 것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각 독립 교회 주교회의의 관할 지역은 국경선과 일치하며(중동 지역에는 예외가 많음), 서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는 외국 정교회들은(디아스포라) 보통 모교회(母敎會)에 소속되며 그 주교회의의 지배를 받는다. 이 디아스포라들은 모교회의 권위 아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체제로 인해 정교회의 관할권이 교회법과 무관하게 중복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는 모두 인종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중세기에서 유래한 몇 가지 요인들(예를 들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로 인해 오늘날 정교회 안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했다. 그 결과 민족 문화와 종교의 일체화도 나타나게 되었다. 민족 문화와 종교의 일체화는 정치적 조건이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의 생존을 돕는 때도 있었으나, 선교의 확장을 방해하고 교인들의 그리스도교적 일체감을 가로막기도 했다.

성직자평신도

정교회에서는 교회 생활의 기본 원칙으로서 영성체와 친교를 강조했기 때문에 성직주의(clericalism)가 발달하지 못했다. 평신도를 주교 선출에 참여하게 했던 초기 교회의 관행은 동방 교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위직 성직자들, 예컨대 사제들과 보제(補祭)들은 일반적으로 결혼한 남자이다 (→ 수도회). 정교회의 현대 교회법은 한번만 결혼하고 배우자가 과부나 이혼녀가 아닐 것을 전제로 결혼한 남자에게 보제직 및 사제직 임명을 허용하고 있다. 이 규정은 절대적 일부일처제의 일반 원칙을 반영하는 것이고 정교회는 이 일반원칙을 사제직 지원자들이 엄격하게 준수해야 할 그리스도교적 규범으로 간주하고 있다. 보제와 사제는 서품을 받은 후에는 결혼할 수 없다 (→ 독신).

주교들은 결혼하지 않은 성직자들이나 홀아비가 된 사제들 가운데서 선출된다. 결혼하지 않은 주교를 요구하는 규칙은 수사들이 성직 사회의 엘리트를 대표했던 6세기에 제정되었다. 오늘날 정교회에서는 수사의 수효가 줄었기 때문에 일부 지역 교회에서는 새로운 주교 후보자를 찾기 어렵게 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정교회의 평신도들은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주교 선출에 참여하도록 허용되는 것 이외에도 교회 행정과 신학 교육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에서는 거의 모든 직업 신학자들이 평신도들이고 평신도들이 설교자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전례와 성사(聖事)

전례

전례의 역할

정교회의 예배는 신학적으로 풍부한 내용과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다양하기 때문에 정교회의 연속성과 일체성을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중동과 발칸 반도를 지배했던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에 종교적 지식과 경험의 유일한 원천이던 예배 때문이었다.

신자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교회가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은 동방 그리스도교인들 경험의 기본적인 표현이다. 이 개념이 없으면 주교가 전례에서 교사와 대사제로서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정교회 교회 구조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신성한 삶에 참여한다는 개인적인 경험도 공동체의 연속적인 예배 행동이라는 틀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권위있는 많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동방 교회의 전례가 서방 교회의 전례보다 그리스도교 교회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동방 교회의 전례가 항상 인간의 정서적·지적·미학적 능력에 동시에 호소하는 총체적인 경험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에는 매우 다양한 모델과 상징이 포함되어 있으며, 공식적인 신학적 진술과 신체적인 지각 및 몸짓(예컨대, 음악적인 분향, 부복 자세), 시각 예술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교육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례에 참여하는 것은 전례의 모델에 친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델들 가운데 많은 것은 교회의 역사적·문화적 유산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교한 고대 전례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교리 교육을 통해 신자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교회는 전례 문제에서는 항상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 결과 전례의 개혁은 신앙 그 자체의 개혁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전례의 주기

비잔틴 전례 전통의 주요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례상 연도(年度)의 다양한 주기를 특색짓는 찬송가 텍스트가 풍부하고 다채롭다는 점이다. 어떤 특별한 전례서에는 주요주기마다 찬송가가 수록되어 있다. 부활절 주간의 주기들은 1년 동안의 모든 의식(儀式)들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이것은 동방 교회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부활에 절대적인 중심을 두고 있음을 잘 예시해 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부활절의 날짜는 춘분 이후 첫번째 만월이 든 후 첫째 일요일이다.

6~9세기 비잔틴 교회는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처럼 뛰어난 시인들의 찬송가 저술로 작곡의 황금 시대를 구가했다. 근대에 들어와 찬송가 저술은 대체로 이전 시대 시인들이 수립한 양식을 따랐으나, 질적으로 이 모델들과 맞먹는 찬송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성악은 언제나 카펠라(cappella)이며, 서구화한 미국 교구에서만 약간의 예외가 인정되고 있다.

성만찬 전례

정교회 예배에서는 2가지 성찬 전례가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른바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전례와 위대한 성 바실리우스의 전례가 그것이다. 이 두 전례는 9세기에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되었으나 위대한 성 바실리우스의 전례에서 사용되는 성찬 '규준'의 표현은 4세기에 성 바실리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성 바실리우스의 전례는 성찬 규준의 텍스트만 다를뿐 중세기에 확립된 전례의 전반적인 구조는 동일하다.

성사

현대 정교회 교리문답서들과 교본들은 모두 교회가 7성사(mysteria)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례, 견진, 성체, 신품, 고백, 성유(중세기 서방 교회의 '극단적인 도유 성사'), 결혼 성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성사에 관한 텍스트인 전례서(Euchologion:기도서)나 교부 전통은 공식적으로 성사의 수효를 제한하지 않는다. 또한 서방 교회에서는 성사(sacramentalia)로 부르는 예수공현 축일 때의 물의 축복, 장례식, 수사를 위한 체발식(剃髮式) 등 의식들과 '준성사'(sacraments)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동방정교회에서 각 성사 의식은 주교나 그 대리인이 인도하는 교회 공동체 전체의 기도이며, 이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으로 해석한다. 하느님의 응답은 교회에 성령을 보내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근거한다고 본다. 성사의 이 두 측면은 마술과 율법주의를 모두 배제한다. 여기에는 성령이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그들의 응답을 요청한다는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교회의 성사에서 하느님의 일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은 인간의 '협력'(cooperation) 또는 '공동 작업'(synergy)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참여로써 성 육신의 목표가 이루어진다.

세례 및 견진성사

세례는 보통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세례 지망자들을 3번 물에 담그는 행위로 실시된다. 따라서 이 의식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받음을 표현한다. 세례 다음에 견진성사가 곧바로 이어진다. 견진성사는 사제가 새로 세례받은 그리스도교도에게 주교가 축복한 '성유'를 발라주는 의식이다. 세례와 견진을 받은 어린이들은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다.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세례 직후 어린이들에게 견진과 영성체를 허락함으로써, 세례를 성만찬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아야 하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세례의 적극적인 의미를 견지하고 있다.

성체성사

동방 교회에서는 성체성사의 본질에 대한 사변이 발달하지 않았다 (→ 성찬식). 기도의 정점(頂點)은 그리스도의 행위를 회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기원함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신비는 교회의 기도에 의해, 성령의 기원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신품성사

정교회는 보제직·사제직·주교직의 3가지 주요성직과 교사직·보좌보제직의 소직제를 인정한다(→ 수도회, 성직임명식). 모든 직제의 임명은 주교가 성찬 전례 때 시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교 임명은 교회법이 정한 주교회의에서 선출되어야 하며 최소한 2,3명 의 주교가 참가해야 한다.

고백성사

초기 교회의 고백성사는 장엄하고 공개적인 화해 의식이었다. 이 의식을 통해 출교된 죄인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백 성사는 모든 그리스도교도의 교인으로서의 지위가 정기적으로 갱신되는 개인적인 고백 행위로 발전했다. 정교회의 의식에서 고백은 일반적으로 법률적 신문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치유로 간주되고 있다.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율법주의적이 아닌 것은 죄를 내적 욕정과 노예 상태로 해석하는 동방정교회의 교부(敎父)식 접근 태도 때문이다. 법률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외적인 범죄 행위뿐인데, 이 행위는 인간의 내적인 질병을 표출한 것이다.

성유성사

성유성사는 기도에 의한 치유의 한 형식이다. 그리스 교회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성 수요일 저녁에 온 회중을 위해 이 의식을 거행한다.

결혼성사

결혼은 장엄한 면류관 의식으로 거행되는데, 이는 하느님 나라에 성사로 '투사'(投射)된 영원한 결합을 상징한다. 결혼에 관한 정교회 신학은 법률적인 의미의 이혼불가성보다는 결혼의 성사적 영원성을 주장한다.

건축과 성상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 이래로 동방정교회는 다양한 교회 건축 양식을 발전시켜 왔다 (→ 도상학). 주된 모델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6세기에 완성한 콘스탄티노플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바실리카 꼭대기에 거대한 을 세웠는데, 이는 하늘나라가 임재하는 것, 즉 성찬 의식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상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현대 정교회 교회들에서 교회 본당과 성소를 분리하는 성상 칸막이는 상당히 후대에 발전된 것이다. 843년 성상파괴론에 맞서 정교회가 승리를 거둔 이후 성상의 항구적인 계시 역할이 새롭게 강조되었다 (→ 성상파괴논쟁). 성상칸막이는 전례에서 제단 앞의 커튼을 여닫는 행위와 더불어 성찬 의식의 신비스럽고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신비가 '비밀'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찬 전례를 통해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을 때 이미 계시된 신성한 생명과 앞으로 올 '새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동방정교회는 이교적인 우상 숭배를 상기시키는 3차원적인 성상들 이외에도 풍부한 성화 전통을 발전시켰다.

휴대 가능한 성화들은 나무에 채색한 것이 많지만 에나멜 기법과 모자이크를 활용한 것도 있고, 언제나 가정이나 공공장소에 보관한다.

정교회와 그밖의 그리스도교

그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가 분열한 때는 연대적으로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선교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던 때와 일치한다. 그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는 다같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팽창에 기여했으나 그 방법은 서로 달랐다. 서방 교회는 새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라틴어 전례를 따르도록 하여 라틴어를 그리스도교 문명의 유일한 매체가 되게 했고, 교회의 통일을 위한 주요수단으로 삼았다. 반면 동방 교회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처음부터 성서와 전례를 개종한 민족의 모국어로 번역한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슬라브 민족들의 토착 문화와 통합되었고, 세계의 정교회는 중앙집중화한 기구라기보다는 민족 교회들의 친목단체로 발전했다.

피렌체 에큐메니컬 공의회(1439)가 실패한 이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회복하려는 공식적인 노력은 없었다 (→ 개신교). 그러나 영국성공회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는 특히 19세기 이래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교인과 신학자들이 중심이 된 몇몇 비공식 협의체는 동방정교회와 영국성공회의 '앵글로 가톨릭'파 사이의 상호 이해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정교회는 성공회의 신앙 내용에 관한 만족스러운 진술을 얻기 전까지 화해를 위한 공식적인 조치를 취하는 데 극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정교회는 처음부터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했고, 그 대표들은 금세기초부터 실천과 관련된 '삶과 노동회의', 신학과 관련된 '신앙과 직제회의'에 참여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은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 회원 교회의 범위를 넘어 더 넓게 확대되었다. 공의회 정신 준수 원칙과 1960년대에 교황 파울루스(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간의 여러 차례 회의에서 교황이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와 동등한 자격으로 공식석상에 나선 것은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보다 깊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한 의미심장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분열시켰던 주요이유인, 교회가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정의 실현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는 서방 교회의 경향은 두 교회 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교회·국가·사회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서방 교회는 다른 어떤 개별적 기구가 수행할 수 없는 사회 통합 기능을 떠맡았다 (→ 교회와 국가). 그 결과 교황들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권위를 공식적으로 부여받게 되었다. 동방에서는 제국 체제가 1453년까지, 러시아에서는 1917년까지 유지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는 제국의 정치적 틀 안에서 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개념은 약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교회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와 제국이 모두 초자연적이고, 원칙적으로 우주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시기에 이 개념은 민족 국가에 신성한 지위를 부여하는 체제로 점차 발전했다 (→ 황제교황주의). 오늘날 정교회 교회들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는 현대의 교회 민족주의는 제국과 교회의 중세기적 동맹관계가 낳은 부산물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정교회의 입장은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에 뚜렷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하느님에 대한 자족적인 지식, 세속화된 세상에서 그리스도교도의 참된 증인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 즉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는 합리적인 틀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도의 증언 형태는 매우 다양했고, 정교회는 전통적으로 은수자·정치가·수사·황제도 교회 성인에 포함시켜왔다.

정교회는 개인 또는 사회 윤리 분야의 구체적인 내용을 법전화하거나 체계화하는 일을 소홀히 해왔다. 정교회는 오히려 자유로운 인간의 양심을 신뢰한다. 그리스도교도 개개인은 〈신약성서〉와 성인의 위대한 본보기에 비추어 자신이 행동해야 할 바를 결정한다.

백과사전 카테고리

브리태니커 백과 > 종교 > 세계의 종교 > 정교회



[출처] 엠파스 백과사전 (http://100.empas.com/)
[원문] 동방정교회

by 삶, 그것은 이야기 | 2008/07/24 10:10 | 찬찬히 들여다 보다 | 트랙백 | 덧글(0)

테오도루스

테오도루스 [Theodorus of Mopsuestia] 블로그담기 | 인쇄

350경 시리아 안티오크~428/429 킬리키아 모프수에스티아.

시리아의 신학자.

당시 가장 위대한 성서 해석자이며 안티오크 학파의 영적 지도자로 인정된다. 친구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함께 유명한 소피스트이며 수사학자인 리바니우스 밑에서 공부했다. 369년 크리소스토무스의 영향을 받아 금욕주의자가 되었다. 안티오크 근처의 수도원에 들어가 378년까지 그곳에서 공부했다. 381년 사제가 되었고, 392년경 모프수에스티아의 주교가 되었다. 당시 동로마 교회에 전염병처럼 번지던 신학논쟁에 가담했으며, 402(또는 403)년에 저작활동을 시작하여 안티오크 학파의 주요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주의 만찬, 니케아 신조, 성례전, 성서 대부분의 책들에 대해 주석서를 썼다. 또한 성령, 성육신, 제사장직, 주석 방법, 신학논쟁, 수도원주의 등 신학적·실천적인 문제에 대한 글도 썼다. 그의 작품들은 에데사(지금의 터키 우르파)에서 시리아어로 번역됨으로써 표준이 되었다. 그는 해석가로서 전례 없는 비평적인 기준들을 사용했다. 경쟁 해석학파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쓰는 우의적인 해석 대신 현대 학문을 예기하는 과학적·비평적·문헌학적·역사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성서의 여러 책들이 씌어질 당시의 역사 상황들을 고려함으로써〈시편〉에 실린 많은 시가 BC 2세기에 속한다는 오늘날의 견해를 예기했으며〈역대기〉,〈에스드라〉, 성서의 일반 서신서들 같은 책들을 정경이 아닌 것으로 배제했다.

테오도루스는 에페소스 공의회(431)가 정죄한 바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에 동조하는 네스토리우스 교회, 즉 '동방의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안티오크 학파를 추종하던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테오도루스를 가리켜 '해석자'라고 했으며, 그를 모든 신앙 문제에서 가장 큰 권위자로 여겼다. 테오도루스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원을 받은 논쟁이 절정에 달했다. 칼케돈 공의회(451)는 그리스도의 인성 견해를 옹호했지만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는 테오도루스의 견해와 저작을 단죄했다. 484년 페르시아 공의회가 그를 올바른 믿음의 수호자로 인정한 뒤 동방교회는 테오도루스의 신학에 동조했고, 그 이래로 네스토리우스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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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엠파스 백과사전 (http://100.empas.com/)
[원문] 테오도루스

by 삶, 그것은 이야기 | 2008/07/24 10:09 | 찬찬히 들여다 보다 | 트랙백 | 덧글(0)

네스토리우스

네스토리우스 [Nestorius] 블로그담기 | 인쇄

개요

4세기말경 소아시아 게르마니시아~451경 이집트 파노플리스.

콘스탄티노플의 초기 주교.

그리스도의 본성(nature)과 위격(Person)에 대한 견해 때문에 431년 제3차 에페소스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그결과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여러 네스토리우스 교회들이 생겨났다(→ 콘스탄티노플 교회, 그리스도 양성론). 〈다마스쿠스의 헤라클리데스의 책 Book of Heraclides of Damascus〉이라는 변증서를 썼다.

출생과 초기생애

페르시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안티오크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장로 임명을 받았는데, 몹수에스티아의 주교 테오도루스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안티오크 근처 성 유프레피우스 수도원에 들어간 뒤 설교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뛰어난 음성을 지녀 연설을 아주 잘했으며, 아름다운 눈동자와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다고 한다.

428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했을 때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상황은 혼란했다. 전임 콘스탄티노플 주교 시시니우스가 죽은 뒤, 주교 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되자, 이 자리를 놓고 교회사가인 시데의 필립푸스와 434년 결국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프로클루스가 줄곧 대립하고 있었다. 또한 이 도시에는 정통신앙을 위협하는 이단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는 4월 10일 주교에 취임하면서 "황제여, 당신이 이 땅에서 이단들을 말끔히 없애버린다면 나는 당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여 은혜를 갚겠습니다"고 선언했다. 5월 30일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단을 제재하는 칙령을 발표했고, 네스토리우스는 그들을 열성적으로 탄압했다.

교리논쟁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 아나스타시우스를 전속사제로 데리고 왔다. 이 사람은 11월 22일에 설교하던 중 마리아에게 ' 테오토코스'(Theotokos:하느님을 수태한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 반대했다. 이 명칭은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격분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의 편을 들어 성탄절에 마리아가 왜 테오토코스가 아닌지를 주장하는 설교를 했고, 이런 내용의 설교를 그뒤로도 여러 차례 계속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 명칭이 아리우스주의(4세기초 아리우스가 처음 주장한 이단설로 예수도 피조물이며 半神에 불과하다는 신앙)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그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으며, 또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양자로 삼은 단순한 인간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안티오크의 주교 사모사타의 파울루스(260경~270 재위)가 내세운 이단설을 다시 주장하고 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릴루스(412~444 재위)가 이 문제에 개입하여 마침내 네스토리우스를 몰락시킨 일련의 사건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네스토리우스의 설교사본들은 외국에까지 널리 퍼지고 있었으며, 이집트에서는 그 설교내용을 놓고 수도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적도 있었기 때문에 키릴루스는 429년 부활절 직후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를 공격하는 회람을 발행했다. 키릴루스가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한 데는 2가지 동기가 있었다. 첫째, 그는 정말로 네스토리우스가 순결한 신앙을 더럽히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르기를 거절한 것은 하느님이자 사람인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그는 자기의 전임 주교 테오필루스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경쟁교구인 콘스탄티노플의 입지를 약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렇게 신학적인 동기와 정치적인 동기가 뒤얽혀 있었다.

그해(429) 여름이 끝나갈 무렵,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자신의 오류를 시인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로부터 단지 짤막하고 퉁명스러운 답장만을 받은 데다가, 자기의 징계를 받고서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친 자기 휘하의 성직자가 네스토리우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키릴루스는 먼저 로마 주교 켈레스티누스(422~432 재위)와 접근 한 뒤 황실에 지원요청을 했다. 켈레스티누스는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거나, 로마에서 정죄를 당한 바 있는 펠라기우스(원죄 교리를 거부함)의 제자들 몇 명을 받아들인 적이 있던 네스토리우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켈레스티누스는 네스토리우스가 쓴 책들의 사본을 당시 뛰어난 신학자이자 서방교회 수도원제도의 주요 조직가인 요한네스 카시아누스에게 보내어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요청했다. 그런 다음 430년 8월에 공의회가 열렸고 이 회의는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했다.

그해 11월 키릴루스는 자신의 교구에 소속된 주교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불러모으고 네스토리우스에게 편지로 12개의 명제를 제시하면서 그것을 저주하면 파문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 편지를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키릴루스의 사절들은 자기들이 선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황제가 431년 성령강림절에 에페소스 공의회를 연다고 공포해놓은 상태였다. 이 공의회가 열리면 이집트에서 망명한 사제들을 시켜 키릴루스를 고소하게 하여 그를 단죄하겠다는 것이 네스토리우스의 계획이었다.

에페소스 파문

에페소스 공의회는 6월 7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특정 대표들의 도착이 늦어져 개회가 지연되었다. 특히 안티오크 주교 요한네스(428~441)의 도착이 늦었는데, 그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에페소스 주교 멤논의 귀띔을 들은 키릴루스는 요한네스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공의회를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6월 22일에 1차 회기가 시작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 회의 참석을 거부하였고, 키릴루스를 비롯한 회의 참석자들은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했다. 나흘 뒤 에페소스에 도착한 요한네스는 대립회의를 소집하여 키릴루스와 멤논을 파문했다. 7월 10일 로마 주교 켈레스티누스가 보낸 3명의 사절이 에페소스에 도착했다. 다시 주도권을 잡은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를 다시 정죄했다. 양측은 모두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음모에 음모가 뒤따르던 중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누이 풀케리아(과거에 네스토리우스에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음)의 말을 듣고 네스토리우스를 안티오크 근처의 수도원으로 추방하였고, 공의회는 폐회되었다.

그는 추방된 수도원에 4년간(431~435)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사정을 자세하게 기록한 〈비극 Tragedy〉이라는 책(이 책은 몇 부분만 남아 있음)을 썼다. 그는 이제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논쟁은 계속되었으나 점차 교회의 통합을 위하는 쪽으로 발전한 끝에 동방파(안티오크의 요한네스 지지파)와 키릴루스파는 교리문제를 네스토리우스 개인의 운명에 관한 문제와 별도로 취급한다는 점에 합의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안티오크 근처에 계속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난처한 일이었으므로, 요한네스는 어쩔 수 없이 네스토리우스를 추방하도록 황제에게 건의하였다. 황제는 그를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곧 그것이 너무 관대한 명령이라고 여기고, 다시 그를 리비아 사막에 있는 대(大)오아시스(지금의 카리야 오아시스)로 옮기라고 명령했다(436~437경). 그뒤에도 그는 약탈자들 때문에 파노폴리스(아크밈)로 갔다가, 그곳에서 시에네(아스완) 맞은편 엘라판틴으로, 그뒤 다시 파노폴리스로 갔다. 네스토리우스는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완전히 고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방문객도 있었고 편지도 왔다. 그는 자기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유티키아누스 논쟁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유티키아누스 주의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완전히 포함·흡수되어 인성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사상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에게 그들의 주교 플라비아누스(446~449 재위)와 로마 주교 레오(440~461 재위)를 지지하는 글을 써 보냈고, 키릴루스의 계승자 디오스코루스가 플라비아누스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보았다. 그것은 네스토리우스 자신이 당했던 수난의 반복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자기 사상의 변호서이자 자서전이기도 한 책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는 이 책에 〈다마스쿠스의 헤라클리데스의 책〉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출판하기 위해서 가명을 사용했다. 이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네스토리우스의 글 가운데 직접 쓴 유일한 논문으로, 1895년에 시리아어 번역판이 발견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450년 7월 28일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당시 살아 있었다. 짐작컨대 후임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이전부터 그를 문명사회로 되돌아오게 할 결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나, 이러한 소식이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가 죽은 뒤였다. 그가 죽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시작되기 바로 이전 아니면 직후이다.

교리와 의미

그당시 알려진 대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그리스도를 인간과 신 2개의 위격으로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자신은 그러한 견해를 배척했으며,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키릴루스의 해석은 오해에 근거한 것이었다.

실제로 네스토리우스가 가르친 것은 ' 프로소폰'(prosopon) 방식의 결합이었다. 그리스어 프로소폰은 다른 대상들을 수단으로 사용해 자신을 확장하는 한 개인의 자기현시를 뜻한다. 예를 들면 붓은 화가에게 프로소폰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아들은 인성(人性)을 사용하여 자신을 현시하였다. 그러므로 인성은 그의 프로소폰 안에 포함되며, 따라서 현시의 유일한 대상은 그 자신이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철저한 탄압을 받아 사라졌지만, 그밖의 지역에서는 존속하였다. 페르시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받아들였는데, 그 주요목적은 페르시아 군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가 페르시아의 원수인 로마인들의 종교와 같지 않음을 보여주어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신도의 수효는 아주 적지만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왔고 이들은 이라크·소련·인도·이란·시리아·남북 아메리카 등지에 살고 있다.

J. G. Davies 글 | 李吉商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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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네스토리우스

by 삶, 그것은 이야기 | 2008/07/24 10:07 | 찬찬히 들여다 보다 | 트랙백 | 덧글(0)

경교

경교 [景敎] 블로그담기 | 인쇄

기독교 종파 가운데 하나인 네스토리우스교(Nestorianism)가 동양에 전래된 이후 붙여진 명칭. 635년 여러 명의 선교사들이 페르시아로부터 당나라의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는데, 중국인들은 그들의 신앙 및 사상을 경교라고 불렀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교회 감독이었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는 그리스도의 이인격설(二人格說)을 주장했다는 비난과 함께 마리아 신모설(神母說)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교권파인 시릴(Cyril) 일파에게 몰려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정죄되어 이집트에서 유배생활중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설을 신봉하던 사람들은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신앙생활을 개척하였다. 교세가 확장되자 페르시아의 토착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 이슬람교의 박해가 시작되자 네스토리우스교인들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 태종(太宗) 때였으므로 각 지역의 문화와 종교가 모두 포용될 수 있었고, 네스토리우스교도 경교로서 수용되어 폭넓게 전파되었다.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635년은 신라의 선덕여왕 2년, 고구려의 영류왕 18년, 백제의 무왕 36년에 해당하며, 경교의 중국 전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세워진 781년은 통일신라의 선덕왕 2년에 해당된다.

당시 당나라와 삼국, 특히 통일신라와 밀접한 관계에 비추어볼 때, 당나라 조정의 환영을 받으며 불교에 못지 않은 지위를 수 세기 동안 누렸던 경교가 우리 나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일본 문헌인 ≪속일본서기 續日本書紀≫ 성무천황기(聖武天皇紀)를 보더라도 783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경교 선교사 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천황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고, 남만주에서도 1928년에 경교도의 분묘와 7개의 와제(瓦製) 경교 십자가, 그리고 동방박사의 아기예수 경배도가 조각된 바위 등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과 만주지역에서의 경교의 영향력은 한반도에서도 입증되었는데, 1956년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유물 중 석제 십자가, 동제 십자가와 더불어 마리아관음상 등이 발견되어 경교적인 흔적을 확연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의 경교전래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기독교동점사(基督敎東漸史)의 권위자인 고든(Gordon,E.A.)이 우리 나라의 경교전래를 밝히기 위한 연구기념으로 1917년 금강산 장안사 부근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조비를 세웠는데, 흑대리석이 아니고 백대리석인 점에서 원래의 비와 다를 뿐이다. 이것을 목사 김양선(金良善)이 탁본하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해 놓았다.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경교의 구실 때문에 기독교의 한국 전래는 통일신라시대로 소급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참고문헌≫ 東方基督敎史(金光洙, 基督敎文社, 1971)
≪참고문헌≫ 아시아基督敎擴張史(金光洙, 基督敎文社, 1973)
≪참고문헌≫ 韓國基督敎史-韓國景敎史編-(吳允台, 惠宣文化社, 1973)
≪참고문헌≫ 韓國基督敎傳來史(金光洙, 基督敎文社,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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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엠파스 백과사전 (http://100.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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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 그것은 이야기 | 2008/07/24 10:06 | 찬찬히 들여다 보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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